예술의 세계로 빠져든다… 걷고, 쉬고, 보았을 뿐인데
솔깃했다. '지하철 아트밸리'라니. 동대문 근처 직장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소문나는 중이라고 했다. 설명인즉슨, 지하철 4호선은 최신 트렌드의 디자인·문화예술 세계와 이어주는 중요한 '문'이란다. 최근 문을 연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그 기폭제가 됐다. DDP와 바로 연결되는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대학로와 맞닿아있는 혜화역,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성북구 갤러리 촌으로 향하는 한성대입구역을 잇는 곳이 바로 '4호선 아트밸리'다. 특히 혜화역엔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낙산공원이 있어 근처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일부러 찾아간다고 했다.
지난 8일과 9일 '아트 밸리' 코스에 도전했다. 하루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DDP 관람을 더했고, 다른 하루는 점심때를 맞아 DDP를 제외하고 다녔다. 그냥 걷고 보았을 뿐인데, 무언가 풍성한 한상차림을 받은 듯한 느낌이다.
혜화역 2번 출구에서 쇳대박물관 쪽으로 올라가면 '낙산공원'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쇳대박물관 옆에 있는 이탈리안 음식점 '핏제리아 오'는 최근 가장 '핫(hot)'하게 뜨는 맛집이다. '주말용 코스'로 넣어야겠다. 낙산공원까지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 길이지만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하이힐'은 삼가는 게 좋다. 낙산공원 내의 낙산정에 앉아있으면 정말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 왠지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다. 공원 주차장 길로 내려오다 보니 '이화마을'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벽화로 유명한 곳이다. 몇년 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천사 날개 벽화 앞에 사진 찍는 모습이 방영된 이후 커플들이 '신고식'하듯 다녀간 곳이다. 최근엔 웨딩 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다. 그래서인지 곳곳마다 중국 관광객들이 잔뜩이었다.
(왼쪽부터) 낙산공원 산책로 / 이화마을
동숭아트센터를 지나 지하철역까지 다시 내려간다. '연극을 보러오라'는 대학생들의 손짓이 싱그럽다. 길거리 공연 하는 이들에게서 생동감이 솟아난다. 농축된 젊음의 기로 세례받은 기분이다.
도로를 따라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 당도했다. 2분 거리에 '서울 5대 빵집'이라는 별칭의 '나폴레옹 과자점' 본점이 있다. 5번 출구는 공사 중이었는데 정면 6번 출구 오른편 4번 출구를 확인하면 된다. 이곳에서 빵을 사서 혜화문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동네주민들이 '혜화문공원'이라고 부르는 쉼터가 나온다. 음식을 먹고 쉬어갈 수 있는 '아지트'다. 바로 앞에 '갤러리 버튼' 등 몇몇 갤러리가 있다. 인근엔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혜화동 길'을 주제로 최근 선보인 재능교육혜화문화센터가 있다.
점심은 여기서
나폴레옹 과자점 잣 호두 타르트 나폴레옹 과자점의 대표 제품인 사라다빵(3500원)과 가평잣 호두타르트(5700원)를 샀다. 사라다빵은 평범한 듯 중독성 강한 맛이다. 타르트의 고소함이 오래간다. (02)742-7421 바로 옆집인 블루오 파스타에서 테이크아웃하는 것도 좋다. 생면과 소스('아라비아따' 7500원·'까르보나라' 7500원)를 취향에 따라 골라 담을 수 있다. 빵이나 파스타가 싫다면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국시집'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국시 9000원, 수육 2만8000원.
걷기 정보 혜화역으로 돌아오는 대신 혜화문에서 성북로를 따라 주민센터를 지나면 최순우 옛집, 조지훈 집터 등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성북구립미술관 등 '예술 투어'를 좀 더 할 수도 있다.
서울 참 예쁘다, 이 거리가 말해주네요
자연(自然)보다 인간이 만든 문명(文明)을 사랑한다. 여행을 가도 산·바다보단 도시의 빌딩숲을 선호한다. 산을 오르기보단 도심을 걷고 싶었다. 1시간 30분 안에 땀이 날 정도로 걷고 점심도 해결할 수 있는 코스를 짜봤다. 이름하여 '서울 다시 보기 걷기코스'. 경복궁, 청와대, 인사동, 청계천 등 관광명소를 도는 코스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라면 한국인이 걷기에도 즐거우리라.
12일 오전 11시 30분, 세종대로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 광장에서 출발했다.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정부청사를 끼고 좌회전하면 효자동 쪽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가 곧 나온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경복궁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돌담을 오른쪽에 두고 빠르게 걸으면 청와대가 보인다. 청와대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한다. 돌담을 따라 계속 걷는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래, 서울이 꽤 예쁘고 볼만한 도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청와대 춘추관 옆으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골목이 있다. 골목 어귀 공근혜갤러리가 이정표가 된다. 곧 총리공관이 왼쪽에 나타난다. 우회전해 삼청로를 따라 걷는다. 우리은행 옆에 점심을 먹을 '메조디파스타'가 있다. 삼청파출소 앞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북촌로5가길이다. 카페, 옷집 등 작고 예쁜 가게가 가득해 눈과 마음을 홀리기 십상이니, 점심시간 안에 회사에 복귀하려면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
(왼쪽부터 ) 경복궁 돌담을 따라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 / 청계천
곧 아트선재센터가 보인다. 센터 옆 율곡로3길을 따라 걷는다. 덕성여중과 여고 사이를 지나면 안국동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면 인사동이다. 지팡이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는 관광객, 데이트 나온 연인들로 북적북적하다. 여유로운 이들 사이로 정장 입고 운동화 신은 남성이 땀까지 흘리며 걷고 있으니,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당연하다. 종로2가 사거리를 지나 계속 직진하면 왼쪽으로 산업은행이 1층에 있는 삼일빌딩이 나오고, 그 앞에 청계천이 흐른다.
계단을 이용해 청계천으로 내려간다. 점심 먹고 걷는 직장인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구나' 안도감이 든다. 물 흐르는 소리가 상쾌하다. 청계광장에서 지면 레벨로 올라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동화면세점 광장이다.
점심은 여기서
'메조디파스타'의 파스타.
새거나 젖지 않는 종이컵에 담아준다. 지난 3월 삼청동에 문 연 프랑스 파스타 전문점 '메조디파스타'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파스타 생면(生麵)을 사용한다. 흔히 사용하는 딱딱한 건면(乾麵)과는 다른 식감인 데다, 삶는 시간이 3분 30초로 훨씬 짧다. 그만큼 식사 시간이 절약된다. 새거나 젖지 않는 종이컵에 담아주니, 바쁘면 테이크아웃해서 걸으며 먹어도 된다. 7가지 소스 중 하나, 7가지 파스타 중 하나를 고르고, 두 가지 치즈 중 뭘 뿌릴지 정하면 끝. 스탠더드 사이즈 7000~8500원에 1000원을 추가하면 소프트음료가 딸려온다. 프랑스에서 공수한 반죽으로 만든 크루아상·뱅오쇼콜라 등 페이스트리(각 1800원)는 가격 대비 품질이 매우 훌륭하다. (02)6328-3445
걷기 정보 경복궁 돌담 맞은편 길도 걷기 좋지만, 정오를 조금 앞둔 시간대에는 돌담 쪽에 그림자가 드리워 더 시원하다. 인사로의 인파를 헤쳐나가기 짜증나면 조계사 앞을 가로지르는 우정국로를 선택해도 좋다. 이 길을 쭉 걸으면 광교가 나온다. 거기서 좌회전하면 청계광장 방향이다.
도시락 먹는 재미에 푹… 꿈같은 1시간이 후딱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인디 팝듀오 가을방학의 노래 '속아도 꿈결'의 한 자락이다. 맞다. 산책은 이런 것이다. 쏟아지는 일 때문에 당겨진 실처럼 팽팽한 정신줄을 잠시 놓자. 점심때만이라도 잠시 꿈결 같은 산책길에 속아보는 것도 좋다.
일단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에 서자. 큰길을 따라 500m쯤 걸어가다 보면 통인시장이 나온다. 이 산책의 첫 유혹은 이 시장 명물인 도시락 카페. 시장에서만 통용되는 엽전(개당 500원)을 구입한 뒤 빈 도시락통을 들고 가게를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반찬을 고르고 엽전을 준다. 반찬당 엽전 1~2개면 살 수 있다. 반찬을 고른 뒤 시장 내에 마련된 카페에서 밥과 국(각 1000원)을 사서 먹으면 된다. 이 재미에 빠지면 산책은 여기서 끝이다.
시장의 유혹을 이기면 옥인동 골목길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도 곳곳에 복병이다. 플로리스트가 가꾼 꽃이 있는 카페, 핸드메이드 빈티지 액세서리 가게 같은 곳에 한번 눈길을 줬다가는 눌러앉기 십상이다. 남정 박노수 화백의 가옥을 갤러리로 꾸민 박노수 미술관도 있다. 박 화백의 평생 화업과 고미술품, 40년간 꾸민 정원을 보다 보면 컴퓨터 모니터에 지친 눈의 피로가 절로 풀린다.
경복궁역에서 20분만 걸으면 안평대군이 사랑했던 절경(絶景)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옆길로 새지 않고 골목길을 따라 나오면 수성동 계곡이 기다리고 있다. 풍류를 아는 왕자 안평대군이 집을 짓고 살았고, 겸재 정선도 '장동팔경첩'에 담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 중간에 있는 정자에 앉아 물소리를 들어보자. 그들이 이곳을 사랑했던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왔던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배화여고 방향으로 방향을 살짝 틀면 체부동 홍종문 가옥이 나온다.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 한옥이다. 큰길을 건너 통의동 서촌 한옥마을도 한 바퀴 둘러보면 꿈결 같은 산책도 막바지다. 서촌은 개화기에 소설가 이상 같은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 한옥도 1910년대 이후 대량으로 지어진 개량 한옥이다. 회벽 대신 콘크리트 담이 있고, 기와와 양철 지붕이 맞붙어 근현대와 과거가 뒤섞인 모습이 정감 간다. 이곳에서 이상의 단편 '봉별기'의 구절을 떠올린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맞다. 산책의 꿈에서 깨니 마음에 불이 타오른다. 오후도 힘차게 일해볼까!
점심은 여기서
'누각'의 국수. 혀에 감기는 감칠맛이 있다. 수성동 계곡 초입에 있는 건물 1층에 '누각'이라는 작은 음식점이 있다. 좌석은 10석 남짓. 주문하면 주인이 손님에게 훤히 보이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준다. 대표 메뉴??국수와 엄나물주먹밥. 명태로 낸 육수에 면을 말아서 내는 국수는 혀에 감기는 감칠맛이 있다. 쌉싸래한 맛의 엄나물에 간장으로 양념한 주먹밥은 국수 맛을 더 돋운다. 수·목요일에는 국수와 주먹밥 대신 수수밥에 홍합, 표고, 된장취나물을 섞은 비빔밥이 나온다. 국수와 주먹밥 6500원, 비빔밥 9000원. (02)722-4541
걷기 정보 이 산책 코스를 100% 즐기고 싶다면 월요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통인시장 도시락 카페, 박노수 미술관 등 이 코스에 있는 많은 명소가 월요일에는 열지 않는다. 힘들게 걷는 일 없이 한달음에 수성동 계곡에 안착하고 싶다면 경복궁역에서 종로 9번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수성동 계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