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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다시보기...

게시일
2007-06-21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비극적이고
추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군부의 12·12 하극상 쿠데타로부터 시작된 정권찬탈음모는
결국 80년 5월,광주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 민주항쟁은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에 따른 권력의 진공상태를
메우려는 일부 정치군인들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군사작전을 계기로 장차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제5공화국이다.
그러나 제5공화국의 주체들이 영원히 승리한 것은 아니며,
광주시민들이 영원히 패배한 것도 아니었다.
사망자 154명, 행불자 47명, 부상자 2,711명 그리고 연행, 구금자가
509명 등 총 3,4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공식통계이며 수사기간중의 불법연행자만 하더라도
3천여 명이었으며 시위기간의 무자비한 연행은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광주민주항쟁은 그·당시에는 패배한 항재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하여 1980년대 반독재
민주의식과 민주화운동을 성장시키는 견인차로 등장한 것이다.
5·18이 민중항쟁으로 올바른 성격규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 당시 정부에 의해
5·18이 광주사태, 폭동,
국가전복을 노린 불순한 배후세력의 조종에 의해 발생한 내란
등으로 발표된 뒤 광주시민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을 통해 80년 5월의 실체가
전 국민에게 조금씩 알려졌고 88년 6공 정권이 들어선 뒤
국민화합을 모색한다는 미명하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13대국회의 여소야대 정치상황이 만들어 낸
광주 청문회를 통해 80년 5월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찬탈음모가 TV로 전국에 방영됨으로써
광주시민의 처절했던 10일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5·13담화에서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광주민중항쟁의 정당성을 명확히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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