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스트레스 주원인은 무엇인가
- 게시일
- 2006-06-27
#1. 서울 Y대에서 비정규직 교직원으로 일하는 박모(31ㆍ여)씨는 구조조정 얘기만 나오면 밥맛이 뚝 떨어지고 잠을 설친다. 비정규직이 구조조정 1순위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대학 동기들과 임금도 비슷하고 복지도 나무랄 때 없지만, 업무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최근 소화가 잘 안돼 병원을 찾았다가 신경성 위염이라는 진단까지 받았다. 박씨는 “정규직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혹시 실수라도 하면 ‘비정규직이라 어쩔 수 없다’는 비아냥을 들을까 봐 업무 부담감이 정규직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면서 “상관의 지시가 아무리 불합리해도 그저 끙끙 앓으며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2. 고속철도(KTX) 여승무원 최모(29)씨는 최근 해고 통보를 받고는 1년 동안의 승무원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빡빡하고 불규칙한 운행 스케줄 탓에 식사는 하루 한끼로 때우기 일쑤였고, 구두를 신은 채 종일 서 있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발이 퉁퉁 부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다리에 심한 염증이 생겨 수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잘 낫지 않았다.
최씨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일념만으로 고통을 참아냈지만, 돌아온 건 해고 통보였다. 그는 “KTX 운행 초기에는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실상은 막 노동꾼이나 다름없었다”며 “승무원 일을 시작하면서 생리통, 하지 정맥류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린 동료들도 많다”고 귀띔했다.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급증에 따른 사회 전반의 실업공포가 직장인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고용 불안에 따른 심리적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건강 불평등을 낳는 핵심 요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등 이중의 고통을 떠안으면서 건강 양극화의 최전방에 서 있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고려대 김문조 교수팀과 함께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성인 남녀 1만여 명의 건강실태를 조사한 노동연구원 자료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지금까지 근로자들의 건강 관련 연구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학력과 소득이 낮고 노동강도가 센 3D 분야에 주로 종사하기 때문에 건강이 나쁠 수 밖에 없다는 추론 수준이었다. ‘가난한 육체노동자가 부유한 사무직보다 더 빨리 죽는다’는 정도의 논의에 머물렀을 뿐, 고용 불안에 따른 건강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진 못했다.
그런데 본보 취재팀이 2004년 조사자료를 정밀 분석한 결과, 건강하다고 답한 정규직 비율은 65.1%인데 반해 자영업자는 50.6%, 비정규직은 48.6%로 노동지위간 건강 격차가 실증적으로 확인됐다.
이런 경향은 50세 이상 대졸자에 한정하면 더욱 뚜렷해져 정규직(61.6%), 자영업(52.4%), 비정규직(36.4%) 등의 순이었다. 5년간 자료를 통합한 뒤 학력, 소득, 성별, 나이 등 모든 변수를 동일하게 놓더라도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건강상태가 더 나빴다.
여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건강 격차가 더 심했다. 50세 이상 정규직 남성 중 건강상태가 양호한 비율은 57.6%로 여성(43.8%)보다 13.8%포인트 높은 반면, 비정규직은 건강한 남성(38.2%)과 여성(20.0%)의 차이가 18.2%포인트나 됐다. 전체 여성 근로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수 여성들이 질병에 노출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여성 비정규직의 증가가 갈수록 높아지는 이혼율과 맞물려 여성의 빈곤화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2004년 말 현재 전체 빈곤 가구주 중 여성 가구주는 44%에 달한다.
강원대 의대 손미아(예방의학) 교수는 “경제적 자립도가 약한 여성이 이혼할 경우 곧장 비정규직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며 “이들은 비정규직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 건강 양극화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노동시간과 산재보험 가입 여부는 건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주당 평균 근무시간(2004년 기준)은 자영업자가 53.68시간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정규직(53.91시간), 비정규직(39.14시간) 등의 순이었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비해 주당 15시간 가량 일을 많이 하지만, 건강상태는 더 양호하다는 뜻이다. 결국 고용 안정성이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실제 고용 안정성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수록 건강상태가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이 ‘매우 안정’돼 있을 경우 건강한 비율은 71.7%였고, ‘안정’ 68.2%, ‘보통’ 54.1%, ‘불안정’ 49.6%, ‘매우 불안정’ 39.2% 등이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조사 결과는 고용 안정성이 학력과 소득수준 못지않게 개인의 정신적ㆍ신체적 건강을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안정적인 직종에 취업기회를 확대하는 것은 이제 생계 차원을 넘어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