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느냐"
- 게시일
- 2003-05-21
그래, 우리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자!- 파업벌이고 임금달라니
(한국경제 ②노조의 끝 없는 요구)
파업벌이고 임금달라니… 로 출발하는 한국경제 `노조의 끝없는 요구 편`은 사용자들이 들어줄 수 없는 것만 요구하여
파업을 벌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느냐`는 반문은 바로 임금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간의 입장의 차이다.
임금결정을 이론적으로 보면 임금생존비설, 임금기금설,
노동가치설, 잉여가치착취설 그리고 한계생산력설,교섭력설이
있다.
물론 우리의 요구는 임금생존비설과 잉여가치착취설 그리고 교섭력설에 근거한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생계비 충족과 자본가들의 이윤확대와의 대립과 긴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생산성임금제의 기초가 되는 한계생산력설은 부르주아주류 경제학의 핵심이론이자 바이블이다.
노동력이 판매되는 시간은 노동자들이 생계비를 벌어들이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파업을 했다고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무노동 무임금`논리는 바로 생계비를 중단하는 것이고
그것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중단시키는 행위다. 따라서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투쟁은 생존권투쟁이다. 파업의 법적 귀책 사유논쟁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임금보다는 생산성이 우선이라고 했다면 한국노동자들의 임금은 생산성에 미달한다.
95년을 100으로 기준한 2002년의 생산성지수는 206.6, 실질임금지수는 125.2다.
(2003년 민주노총 요구안 해설 p.176을 보라!)
단위노동비용지수 국제비교에서도 선진국에 비해 낮다.(p.177를 보라!)
중국으로 가는 기업 그리고 현재 중국 노동현실과 노사상생은 초국적 자본의 해외진출 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외자기업을 통한 자본유치 그리고 고용창출 초기에는 찬밥,
뜨거운 밥을 가릴 겨를이 없다. 사회주의국가 임금은 기업 내
지불 임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소위 사회기여금(사회적 임금)이 높다.
중국으로 간 자본은 60~70년대 한국에서도 똑 같은 상생의 그림으로, 똑같은 선전문구로 개미처럼 일하는 한국인을 칭송하였다.
자본의 제국주의화, 세계화는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어느 한 지역의 특성을 유지시키지 않는다.
임금결정의 이론은 결정적으로 교섭력설에서 시작하고 막을
내린다. 일찍이 아담 스미스는 노동과 자본의 처지 그리고 단결과 투쟁의 본질에 대해 지적했다.
노동의 보통임금이 어떤 것인가는 어디서나 이해가 결코 같지 않는 이들 두 당사자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에 의존한다.
직공들은 되도록 많이 받기를 바라고
주인들은 되도록 적게 주기를 바란다. 전자는 노동의 임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단결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그것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단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는 하나 두 당사자 가운데 어느 쪽이 모든 보통의 경우 쟁의에 있어서 틀림없이 우위에 설 것인가 다른 쪽을 자기 조건에 복종시킬 것인가를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수가 비교적 적은 주인들은 쉽게 단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법률은 그 단결을 공인하거나 적어도 금지하지 않는다.
반면에 법률은 직공들의 단결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의 가격을 끌어내리기 위한 단결에 대해서는
의회의 법률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한 단결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은 모든 쟁의에 있어서 주인들 편이 훨씬 오래 지탱할 수 있다.
지주, 농업 경영자, 주인 제조업자, 상인들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도 직공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이 이미 획득한 여러 자재로
1년이나 2년은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직공들은 업무가 없으면 1주일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고 1개월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조금밖에 없을 것이며 1년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전혀 없을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서 본다면 직공도 주인에게 마치 주인이 직공에게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가 그토록
긴박하지 않다.
직공들의 단결에 대해서는 자주 듣지만 주인들의 단결에 대해서는 좀처럼 듣지 못한다는 말들을 해왔다.
그러나 그런 말에 입각해서 주인들이 좀처럼 단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 아니라 세상 물정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