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대출광고 세어보니]
버스·지하철·전단 광고 등 2시간만에 200여건 보게 돼
파산·개인회생 광고도 많아… 대출 권하고 파산하라는 셈
라스베이거스 출신 미국인 "도박 도시도 이 정도는 안해"
'안심하오 안심하오~ 대출할 일 생겼는데~ 서류 준비 어떡하오~.'12일 오전 6시40분, 기자가 아침에 눈을 떠 TV를 틀었더니 국악 장단에 어우러진 흥겨운 CM송이 흘러나왔다. 한복을 입은 여성 캐릭터 네 명이 두 팔을 들썩이더니 대출 서류를 서류 파쇄기에 파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곧이어 300만원까지 금융권 연체가 없다면 대출해주겠다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떴다. 약 40분 동안 4~5곳의 케이블 채널에선 알록달록한 캐릭터,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등장해 '300만원까지 즉시 대출' 등을 노래 부르는 대부업체·저축은행 광고 10여개가 쏟아졌다. 새누리당 류지영 의원실에 따르면 케이블 TV를 통해 방송된 대부업 광고는 하루 평균 1364건에 이른다.
◇TV에서 동네 전봇대, 버스·지하철까지 사방에 빚 광고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 정문을 나서니 바로 앞 전봇대에 '카드, 010-XXXX-XXXX 영등포역'이라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카드 발급이 어려운 저신용자들에게 카드를 불법으로 발급해준다는 광고다.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한 버스에는 20% 이상 고금리 신용대출 영업을 하는 A저축은행의 로고가 광고판 형태로 내걸려 있었다. 이 저축은행은 매년 36억원가량의 광고비를 서울시 버스조합에 지급하고, 서울시 버스 7000대(광역·마을버스 제외)에 로고를 광고하고 있다. 버스에 올라타니 '개인 회생, 파산 면책(파산해서 빚 부담 없애는 것), 모든 빚 청산'이라고 적힌 광고가 운전석 뒤에 붙어 있어 눈에 확 들어왔다.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에 도착했다. 환경미화원 임모(60)씨는 "아침엔 지하철 출입구에 덕지덕지 붙은 대출 광고부터 떼는 것이 일"이라며 "얼마 전엔 덩치 큰 젊은이들이 찾아와 '아줌마, 자꾸 전단 떼지 말라고!'라고 윽박지르더라"고 했다.
서울 신정네거리역 길바닥에 12일 대출 광고 명함들이 떨어져 있다. 본지 기자가 아침에 눈을 떠 출근까지 두 시간 동안에만 거리에서 마주친 대부업 대출 광고와 개인 회생, 파산 면책 광고가 무려 200여건에 달했다. 무분별한 대출 광고가 활개를 쳐도 이를 막을 만한 법적 규제가 없다. /성형주 기자
지하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벽에 '아직도 빚을 빚으로 갚고 계십니까? 전화 한 통화로 모든 고민 해결'이라는 개인 회생, 파산 면책을 권하는 액자 광고판이 벽에 붙어 있었다. 지하철 안에도 광고는 끊이지 않았다. 지하철 칸마다 광고판에 개인 회생, 파산 면책 알선 명함이 10여개씩 붙어 있었다. 이쯤 되니, '집에서는 (TV 보며) 고금리 대출받고, 밖에서는 (전단 보고) 파산하라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미국인 페티트(Petit·27)씨는 "라스베이거스(도박으로 유명한 미국 도시) 출신인데, 버스와 지하철에 이렇게 많은 대출과 파산 광고는 처음"이라며 "완전 미친 것 아닙니까?(It's crazy)"라고 했다. 서울 강남의 IT업체로 출근하는 주부 김모(40)씨는 "이제 다섯 살 된 딸이 '산와, 산와~'라는 멜로디의 한 대부업체 CM송을 따라부르고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신 그 노래 따라 하지 말라고 혼내도 무척 좋아해요. 큰 고민이에요."
◇2시간 동안 대출 관련 광고 200여건… 규제 법안, 국회서 낮잠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더니, 친구 페이지에 '대출 24시 문의'란 제목의 게시글이 공유돼 올라왔다. 이 페이지에 접속했더니 현금 5만원권 수십장을 바닥에 뿌려놓은 사진을 올려놓고 '95년생, 당일로 100만원 3시간에 만들어 드립니다' '당일 2000만원 아이템 나왔습니다. 연락해주세요'라는 글들이 수두룩했다. 페이스북 검색을 하다 보니, 불법 사채업자들이 구축한 일수 등 불법 대출 페이지만 100여개가 넘었다. 굳이 인터넷 상의 대출 광고 배너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최고 50억원 대출이 가능한 연 24% 금리 일수대출 상품에 가입하면 백화점 상품권 5만원을 주겠다는 일본계 저축은행 광고도 눈에 띄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최모(32)씨는 "출퇴근하면서 최소 100건의 불법 대출 광고를 원치 않게 보는데, 매일 '내 인생의 이자 상한선은 10%다'라는 주문을 스스로 외우면서 애써 외면하려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 안에 붙은 개인 회생 명함을 빤히 쳐다보던 대학생 김모(25)씨는 "내 친구한테 필요한 정보"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100만원을 벌고 있지만, 대부업체에서 연 39% 금리로 400만원을 빌렸다가 연체해 저한테도 돈을 꾸려는 친구 녀석이 있거든요." 을지로입구역에 내려 명동 한복판에 들어서자 '일수대출, 100% 당일. 중도 상환 시 이자 면제!'라는 문구의 광고 전단 수십 장이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출근까지 2시간 동안 눈에 들어온 대부업 대출 광고와 개인 회생, 파산 면책 알선 광고만 200건이 넘었다. 출근길에도 얼마든지 급전(急錢)을 빌릴 수 있고, 맘만 먹으면 빚을 안 갚고 파산하는 안내까지 받을 수 있었다. 무분별한 대출 관련 광고가 활개를 치는 것은 법적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업 광고를 전면 금지하거나, 청소년 시청 보호 시간대만이라도 대부업 광고를 금지하는 대부업법 개정안 2건이 국회에 올라 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이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