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경남 거창읍에 있는 거창고등학교 강당 뒤편엔 '직업 선택의 십계'라는 소박한 액자가 걸려 있다. 1956년부터 만 20년 동안 이 학교 3대 교장을 맡았던 고(故) 전영창 선생의 철학과 가르침을 그의 아들이자 4·6대 교장이었던 전성은 선생과 5대 교장 도재원 선생이 열 가지 계명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졸업생들은 학교 다닐 때 십계명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 십계명을 꼽는다.
딸 둘을 둔 아줌마 강현정(44)씨가 거창고와 십계명을 처음 만난 건 2011년 봄이었다. 주간지 기자로 일할 때 전성은 전 교장을 인터뷰한 것이 계기였다. 그로부터 만 4년. 강씨는 "이제 내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생겼다"고 했다.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는 안 컸으면 좋겠다, 돈만 많은 사람은 안 됐으면 좋겠다, 나만 혼자 행복한 거 말고 함께 어울려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강씨는 지난 3년 동안 전성은 전 교장과 거창고 교사들, 졸업생 30여명을 인터뷰하고 여기에 자신의 깨달음 등을 묶어 최근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란 책을 냈다. 부제는 '보통 엄마의 직업 십계명 3년 체험기'이다.
거창고는 학생들의 인성 교육을 가장 중요시하는데도 성적 또한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로 인정받는 특이한 학교다. 2013학년도 수능의 경우 전국 일반고 중에서 수능 1~2등급 비율이 49.2%로 4위를 기록했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회의에서 '한국을 대표할 만한 학교'로 이 학교를 꼽은 일화가 알려져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공부와 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학교지만 이 중 핵심 가치는 인성에 있다고 한다.
강씨는 "이 학교는 무조건 인성이 먼저다. 그랬더니 성적이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물론 성적이 안 따라올 수도 있다. 그럴 때도 인간은 소중하고 삶은 충분히 가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는 게 이 학교가 다른 점"이라고 했다.
강씨는 대학 졸업 후 MBC·SBS 등 방송국에서 MC와 리포터 등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결혼하고 딸 둘을 낳은 뒤에 '뭔가 흔적이 남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주간지 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교육 관련 기사를 썼다. 그러다 거창고를 알게 됐다. 그는 "여러 학교를 가봤지만 거창고 같은 학교는 처음 봤다"고 했다.
거창고 졸업생들은 모교에 대한 애정은 유별났다. 한 번은 전남 장수 지역에 있는 절에서 이 학교 졸업생인 여승(女僧)을 만났다. 여승은 인터뷰하는 동안 "당신이 진짜 거창고를 제대로 이해하고서 책을 쓰는 거냐"는 식의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 강씨에게 이 인터뷰는 너무 큰 아픔이었다.
"출판사와 전성은 선생님께 책을 못 쓰겠다고 했다. 학교와 선생님들, 졸업생들에게 감동받은 건 사실인데 난 그처럼 못 살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때 전성은 선생이 "이제야 책을 쓸 때가 된 것 같다"고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거창고 졸업생 중에선 실제 십계명 가르침대로 자신의 인생을 일궈 가는 사람도 많았다. 20여년간 자연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박수용(30회)은 월급이 적은 곳을 택했고, 시베리아호랑이를 찍는 일에 몸을 바치는 등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좇았다. 초등학교 교사 김순옥(26회)은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는 뜻대로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평교사로만 재직했다. 그런 사람들은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돈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가식적이지 않았다.
강씨는 "졸업생 중에는 성공하고 돈 많이 번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까지만 이익 추구를 하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 그러곤 어느 순간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강씨는 무엇보다 자신과 중학교 3학년, 1학년인 두 딸의 삶을 다시 보게 된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했다. 그도 전엔 딸이 공부 못하면 어쩌나, 경쟁 치열한 이 사회에서 실패자가 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부모의 걱정이 클수록 딸은 주눅들고 위축됐다. 그런데 거창고와 졸업생들을 접하면서 반성과 깨달음이 시작됐다.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아이들한테 정말 잘못하고 있구나….'
강씨는 "나 자신에게 커밍아웃했다. '그래, 내 딸 공부 잘하는 거 아니다'고. 그 변화가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내가 편해지니 딸도 편해지더라"고 했다. 그는 "이젠 딸이 좋은 대학 못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게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신 딸이 맘속에 긍정 에너지를 가득 채워 삶을 탄탄하고 행복하게 엮어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