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의리를 베풀며 살아라. 살다 보면 어느 곳에서든 서로 만나기 마련이다.’ 29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한 식당. ‘오늘의 메뉴’와 함께 짧지 않은 문구가 적힌 보드를 가게 앞에 내놨다. 이곳에서 어머니의 식당일을 돕고 있는 조은(25) 씨는 “김보성 CF를 보고 주위 사람들과 얘기하다가 잊고 있던 의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며 “각박해진 세상 속에 의리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손님들도 나처럼 의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적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의리를 외치고 있다. 의리 열풍의 전도사는 단연 배우 김보성이다. 맨손으로 쌀가마니를 후려치며 “우리 몸에 대한 으리(의리)” “신토부으리(신토불이)”라고 외친 한 음료업체의 CF가 발단이 됐다. “으리”로 시작해 “마무으리”까지 16번이나 비장하게 의리를 외친 김보성의 엉뚱함에 사람들은 폭소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CF 영상은 조회 수만 300만여건에 달했다.
온라인은 이미 의리의 놀이터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가 김보성의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레으리잇고(렛잇고)’부터 김보성의 CF를 따라 한 패러디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네티즌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아메으리카노 한 잔 어때?” 등의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의리놀이’에 한창이다.
황당한 ‘병맛 코드’만으로 의리열풍이 분 건 아니다. 온갖 비웃음을 사면서도 데뷔 후 ‘의리’만을 외친 김보성의 뚝심이 더해졌다. 세월호 침몰사고 희생자를 위해 대출까지 받아 1000만원을 기부한 그의 ‘의리어린’ 진심도 한몫했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터지면서 목격한 원칙이 무너진 현실은 사회적으로 의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사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그동안 잊혔던 의리가 재조명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세월호 사건으로 더욱 커졌다”며 “‘대한민국이 가라앉았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다는 상실감에 빠져 의리라는 개념이 주목받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젊은 세대는 의리의 균열을 더 크게 느꼈다. 정부를 넘어 가족에서도 의리가 흔들리는 걸 걱정했다. 이데일리가 20∼50대 100명의 시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30대의 24%가 의리의 회복이 필요한 곳으로 ‘가족’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