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노컷뉴스 김지수 기자] 남존여비(男尊女卑)라 했던가.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여존남비' 사회다. 갈수록 남자들이 설 곳을 잃고 있어서다. 청년들은 취업과 결혼, 중장년은 직장과 가정에서 치이고 밀리기 일쑤다. 하지만 본인도, 주변도 여전히 인식은 조선 시대에 멈춰있어 갈등도 만만찮다. CBS노컷뉴스는 '男子수난시대'의 세대별 실상을 5회에 걸쳐 집중 조망한다. [편집자 주]
<싣는 순서>
①20대 '답'이 없다
②30대 '집'이 없다
③40대 '나'는 없다
④50대 '일'이 없다
⑤60대 '낙'이 없다
“군대 다녀왔으니 이제 진짜 남자네.”
김모(22) 씨가 전역한 뒤 주변으로부터 들은 첫마디였다. 전역을 축하하며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김 씨에게 다가오는 부담감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전역했으니 부모님 속 덜 썩이고 철 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야 했죠. 하지만 군대 다녀왔다고 해서 갑자기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대학에 갓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군대를 다녀오면 곧바로 취업 준비에 직면하게 되는 게 바로 20대 남자들이다.
갈수록 버티기 어려운 시대상을 빗댄 '88 세대'니, '삼포 세대'니 하는 말들도 남자라서 더 와닿는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인생의 가장 파란만장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리 탈출구도 해답도 보이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다.
주변에서는 병역을 마치면 ‘남자 어른’이 되는 관문을 뚫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얼른 사회인으로 자립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기껏 '알바'를 구해봐야 최저임금인 시급 5천원 수준이지만, 이제 성인이다 보니 할 것도 많다. 술은 술대로, 당구는 당구대로, 클럽은 클럽대로, 그러면서도 각종 학원은 학원대로 섭렵해야 하니 등골이 휜다.
그나마 남자들의 세계엔 비용 분담에 '룰'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경제력은 거의 '제로'인데, 연애라도 할라치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비용 부담을 도맡는다.
류모(20) 씨는 “아무래도 남자가 밥도 사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아르바이트로 데이트 비용을 대기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서울 시내 주요 '맛집'의 카드 결제성향을 분석해보면, 남성의 결제비율이 여성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데이트 명소로 꼽히는 지역에서는 메뉴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결제비율이 압도적이다.
비단 만남에서뿐이랴. 전모(25) 씨는 "밤마다 여자친구와 통화할 때도 남자가 걸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2년간 통화비를 부담하느라 휴대전화 통신사 VIP 고객이 됐다”고 털어놨다.
한 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 남자 대학생들의 23%는 연애의 가장 큰 걸림돌로 '데이트 비용'을 꼽았다.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데이트 비용 분담은 '5.7:4.3'이지만, 실제로는 '6.5:3.5'를 분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반이다. '10:0'인 경우도 적지 않을 거라는 게 20대 남성들의 '공분'이다. 오죽하면 "더치페이(각자내기)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까지 회자될 정도다.
20대 남성들의 '수난'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남자'란 이유만으로 사회 통념상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아직도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구태가 "남자 아이가"로 포장돼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데다, 남성들 스스로도 '근육' 중심의 근거 없는 우월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강모(25) 씨가 다니는 회사에는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인사가 있다. 바로 '비비크림 남'이다. 누가 봐도 '패셔너블한' 그 남자 직원은 매일 출근하면 정성스레 비비크림을 바른다.
소문은 회사 내에 조용히, 그러나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본인만 모를 뿐 '비비크림 남'이라고 하면 "아~OO 씨!"로 통하게 된 것.
남성용 비비크림도 따로 출시되는 시대, 남자라고 외모를 가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초식남’, ‘그루밍족’처럼 전통적 이미지와는 차별화된 남자들이 주목받는 시대다.
남성적인 레저 스포츠나 술집을 선호하는 게 전통적인 '육식남'이라면, 문화생활과 카페를 선호하는 게 '초식남'이다.
전통적인 남성의 이미지가 '털털함'이었다면, 이제는 여자보다 더 잘 꾸며 입고 다니는 '그루밍족'이 각광받는 것이다.
패션과 자기 관리에 관심이 많은 김모(25) 씨도 종종 화장품 쇼핑을 간다. "군대에 있을 때 오히려 바깥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에 막사에 비치된 패션잡지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는 그는 "전역 후 유행에 뒤쳐지지 않게 옷을 입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전국 남자 대학생 75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무려 84%는 "상황에 따라 화장을 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개수도 평균 1.8개였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고유 영역은 나날이 허물어지고 있지만,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조선 시대와의 '과도기'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따라가고는 있지만, 가끔은 의문이 들죠. 남자라고 해서 꼭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요.”
한 대학생의 말처럼, 대한민국 20대 남자들은 오늘도 '소년'과 '어른' 사이에서 주변이 요구하는 '남자'까지 거머쥐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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