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내전기>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폼페이우스파를 가리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이 말을 전하면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가 당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카이사르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한 결과 로마는 이미 숨을 거두고 있던 귀족과두정에서 탈출해 제정으로 전환함으로써 이후 400년 이상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 속에서 위기를 보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이사르를 문득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우리 노동운동 상황이 그의 지적을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노동운동은 개정 노동법의 발효 이후 전임자 임금 축소로 노조의 상근인력이 감소하면서 사업장은 물론 상급조직의 활동도 급격히 위축됐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 조합비 인상은 복수노조 문제로 말도 꺼내기 힘든 상황이 됐다. 새로 만들어지는 노조들이 상급조직과의 관계를 끊으면서 조합비를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수노조는 이미 한진중공업이나 유성기업 같은 사업장들에서 기존의 노조를 조직적으로도 와해시키고 있다.
노조 교육에서 만난 간부에게 어떤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다. 하소연에 가까운 답변이 돌아왔다. “버티는 수밖에요”, “언제까지 말입니까”, “노동법이 재개정될 때까지요.” 요컨대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얼핏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곧바로 두 가지 의문이 뒤따른다. 하나는 선거결과가 기대를 배반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다른 하나는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민주통합당이 이 문제를 꼭 해결할 의지가 있을지의 여부이다.
두 가지 의문에서 공통된 점은 그것이 모두 노동운동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동운동 외부에서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노동운동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 물음에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자화상인 것 같다. 최근 민주노총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가 이를 수용할 것인지와는 별개로 노동시간 단축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 맡기려는 위의 자화상을 그대로 닮아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노동운동 자신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참고로 얘기하자면 OECD 최고의 장시간 노동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법정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지만 우리보다 연간 노동시간이 3분의 1 이상 짧은 독일은 법정 노동시간이 주 48시간이다. 법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독일의 노동시간 단축은 법이 아니라 단체협약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노동문제를 노동운동은 자신의 문제로 간주하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우리 노동운동이 당장은 힘이 없어서 그렇다는 변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정 노동법은 이미 15년 전에 만들어졌고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노동운동에는 13년이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문제는 그 오랜 시간동안 언젠가 현실로 닥칠 이 문제를 계속해서 외면해 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 노동운동이 해야 할 일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그 현실은 오로지 장기적인 전망을 준비할 때만 발견되는 것이고 눈앞의 현안에만 매달려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노동운동의 장기적인 전망은 19세기에 한 사람의 천재가 이미 과학으로 정리해 두었다. 우리 노동운동이 한 번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노동자계급의 성서,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것이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우리 노동운동에 지금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자본>으로 돌아가라, 거기에 길이 있다!
[출처] 경향신문 - 오피니언 : 강신준 | 동아대 교수·경제학, 입력 : 2012-04-04 21:15:11ㅣ수정 : 2012-04-05 00:32:45